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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산책

의릉과 경희대에서 만난 세 시대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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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한국외대 근처에는 조선시대, 근대, 현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의릉, 경희대학교, 그리고 과거 중앙정보부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입니다. 각각의 건축물은 각기 다른 시대적 배경과 건축양식을 담고 있어, 짧은 산책만으로도 한국 건축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1. 조선의 정통성을 간직한 공간, 의릉(懿陵)

의릉은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그의 왕비 단의왕후의 능으로, 조선 왕릉 중에서도 비교적 도시 가까이에 자리한 고요한 공간입니다. 이곳의 핵심 건축물인 정자각(丁字閣)은 능의 제향 공간으로, 전통적인 목구조의 건물입니다.

정자각의 건축적 특징

정자각은 ‘丁(정)’자 모양의 평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름의 유래입니다. 주로 왕과 왕비가 함께 묻힌 합장릉에서 볼 수 있으며, 제향 의식을 위한 공간 배치가 고려된 구조입니다.

  • 앞부분은 신위를 모시는 공간,
  • 뒷부분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뉘며,
  • 기둥 간격이 고르게 배치되어 안정감을 주는 비례미가 특징입니다.

기와지붕, 곡선형 처마선, 단정한 단청 등이 어우러져 조선 후기의 건축미를 잘 보여줍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배치도 인상적입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깊고 둥근 곡선형 처마

 

1. 의례 공간으로서의 위엄, 위계 강조

정자각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왕의 제사를 지내는 엄숙한 공간이에요. 따라서, 일반 민가나 사찰보다 훨씬 더 위엄 있고 격식을 갖춘 형태로 설계됩니다. 처마를 크게 드리운 것은 위로부터 덮는 듯한 장엄함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시각적으로 더 웅장하고 신성하게 보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건축의 크기, 장식, 구성요소까지 신분과 용도에 따라 엄격히 규제되었습니다.

정자각은 왕실 건축이기 때문에, 민간이나 일반 묘역에서 볼 수 없는 장식적 요소와 과장된 비례가 허용되었고, 처마 깊이 역시 그런 상징적 표현 중 하나입니다.

 

2. 햇빛과 비를 차단하는 실용적 기능

왕릉 제사는 실외 공간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정자각의 처마는 햇빛을 가리거나 비를 막는 용도도 고려됩니다.
처마가 깊을수록 제기와 신위를 보호할 수 있고, 제관들도 일정 부분 그늘 속에서 의식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3. 중앙축 강조와 시선 유도

정자각은 능침(무덤)과 홍살문 사이의 중앙축선 상에 위치하며, 의례 동선의 중심이 됩니다.
깊게 드리운 처마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정자각 중심으로 유도하면서도, 능침을 향한 시각적 연결감을 만들어줍니다. 건축적으로 매우 의도된 장치라 볼 수 있습니다.

 


 

 

2. 근대 교육과 문화의 상징, 경희대학교 건축물들

의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는 건축 애호가들에게도 유명한 공간입니다. 특히 본관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은 1950~60년대에 건립된 근대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왜 경희대에는 근대식 건물이 많을까?

이는 경희대학교 설립자 조영식 박사의 비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전후(戰後) 폐허 속에서도 이상적 대학 캠퍼스를 꿈꾸며, 교육과 문화, 평화의 상징으로서 ‘건축’을 중시했습니다. 그 결과,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던 서구식 석조 건물들이 다수 건립되었고, 그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등록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 네오클래식(신고전주의) 양식의 본관
  • 로마네스크 양식의 중앙도서관,
  • 모더니즘 영향을 받은 강의동들 

각기 다른 시대의 유럽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된 건물들이 근대 건축의 살아있는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 본관 –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양식

  • 1960년대에 완공된 건물로, 가장 상징적인 위치에 자리함
  • 거대한 기둥과 대칭 구조가 특징
  • 고대 그리스·로마 신전을 연상시키는 위엄 있고 장중한 분위기

 

2. 중앙도서관 – 로마네스크 양식

  • 두꺼운 벽, 아치형 창, 무거운 석조 느낌이 강함
  • 중세 유럽 수도원을 떠올리게 함
  • 내부는 고풍스럽고 조용한 분위기로 학문적 분위기를 연출

 

3. 평화의 전당 – 후기 현대주의 양식

  • 1990년대에 건립된 대규모 공연장
  • 현대적이지만 고전적 요소와 어우러지는 절충형 디자인
  • 외부는 대리석, 내부는 고급 목재와 음향 설비가 특징

 

 

3. 잊혀진 현대사의 흔적, 중앙정보부 강당

 

의릉과 경희대 사이에는 다소 낯선 분위기의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재는 공연장 등으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원래는 중앙정보부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이 건물은 1970년대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가 권력의 상징 공간으로 건립되었습니다. 건축가 나상진은 공공기관 건축을 다수 맡았던 건축가로, 기능주의적 사고를 기반으로 군더더기 없는 형태와 명확한 공간 구성을 지향했습니다. 이 건물에서 소리 없이 말하는 건축, 즉 형태로 시대를 말하는 미학을 보여줍니다. 무거운 콘크리트, 닫힌 입면, 직선적인 구성은 그 자체로 '침묵의 권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 강당의 건축적 특징

 

1. 권위적 위압감을 주는 매스 디자인

  • 건물의 입면(정면)은 장식이 거의 없고, 육중한 콘크리트 매스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 높이보다는 수평적 확장감을 강조하여, 안정감과 위압감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 입구의 포치는 낮게 눌러져 있고, 내부 진입 시 심리적 긴장감을 주는 설계.

2. 폐쇄성과 통제를 고려한 창 배치

  • 창문이 거의 없거나 매우 작고 제한적입니다. 이는 감시와 보안이 중시되던 당시 중앙정보부의 기능을 반영합니다.
  • 건물 내부와 외부의 시각적 교류를 최소화함으로써 감싸진 느낌, 폐쇄적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3. 콘크리트의 물성을 강조한 표현주의적 요소

  • 외장재는 노출 콘크리트 또는 얇은 마감재를 활용해 재료의 물성을 살렸습니다.
  • 이는 당시 유행하던 브루탈리즘(Brutalism) 양식의 영향 아래, 한국적인 해석으로 보입니다.

4. 공간의 중심에 무대가 아닌 '권력'이 있다

  • 일반적인 강당이 ‘공연’이나 ‘강연’을 중심에 둔다면, 이 건물은 권위적 연설, 보고, 지시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좌석의 배치, 무대의 높이, 음향의 반사 구조 등이 일방적 전달과 청취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성북구의 이 작은 동네는 단순한 캠퍼스 타운을 넘어, 건축으로 시대를 기억하는 공간입니다. 조선의 전통 건축미를 간직한 의릉,이상주의적 근대 교육공간으로 탄생한 경희대, 권위주의의 잔영을 보여주는 중앙정보부 강당까지.

이 세 공간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한국의 건축사를 산책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카메라 하나 들고, 오늘은 이 세 시대를 품은 공간들을 천천히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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